Lighteast
by 처하
휴지기
3년 전이었던가...블로그를 첨 시작할 때 난 미국에 있을 때였다.
그땐 정말 할 이야기들이 넘쳐 났었다. 머리에 가득찬 생각들...

요즘은 일이며 여러 가지며 할 것들이 많아 다소 바쁜 것도 사실이지만
사고의 휴지기랄까...뭐 그런 단계에 접어 들고 있는 듯 하다.

나의 히스토리를 보았을 때, 늘 이런 단계를 거치고 나면 뭔가 달라져
있는 나를 볼 수 있었었다.

아마 이 생각의 사고의 휴지기는 2년은 더 갈 듯 하다.
그땐 또 다시 다른 모습의 내가 날 마주하고 있겠지...
by 처하 | 2006/10/28 13:35 | Thingking | 트랙백 | 덧글(0) |
고민...
현실과 이상 사이엔 늘 틈이 있다.
이상이 현실이 될 시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땐
과연 현실과 이상이란 것이 계단과 같은 것이라서 한 스텝 밟고 나면
다음 단계를 밟을 수 있는 속성이 아닐 수도 있기에...

결국 이상은 영원히 이상으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든다.
늘 그래왔듯이
이상과 현실은 병존해야 함인데...

그 사이에서 갈등이 깊어진다.
by 처하 | 2006/10/25 10:17 | Thingking | 트랙백 | 덧글(0) |
한국사회의 차별과 억압


1.한국인은 존비어 체계 속에서 언제나 존대받지 않으면 하대받아야 하는 극단의 선택을 강요 받는 까닭에 모두들 존대받는 사람이 되려고 목숨을 걸고 권력, 출세, 학벌, 권위에 매달리게 된다.따라서 아무리 경제가 발전하고 제도의 민주화가 이루어져도 사람들이 인격, 교육, 윤리, 도덕, 여유 등에 관심을 돌릴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존비어 체계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가 차별과 억압이 일상화하는 삶을 벗어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존비어 체계를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설득해 왔다.

2. 한국인은 존비어체계(존비어체계는 호칭으로 구분된 상하관계에 따라 어휘, 조사, 어미 등에 차이를 두어 문장의 형태를 달리함으로써 상하관계를 한층 엄격하게 담아내는 구실을 하며, 한국어와 일본어만이 호칭체계와 더불어 존비어 체계를 갖고 있다)를 갖춘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는 까닭에 모든 사물을 존비관계로 바라보려는 무의식적 인지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대등과 호혜 관계보다는 차별과 억압 관계를 더욱 당연하고 편안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붉은 색 포도주에 물건을 담갔다 꺼내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드는 것처럼, 존비어체계 속에서 생각을 하다보면 모든 생각이 존비관계로 물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3. 한국어는 존비어체계로 말미암아 인간이 어휘나 문장으로 구체적인 생각을 하기 이전에 이미 언어체계 자체가 강력한 규범력을 갖고 생각과 표현을 전체적으로 끌어가는 매우 특수한 언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인은 존비어체계로 말미암아 무의식 속에 수직적 인지구조를 형성하고 모든 사물을 수직 관계로만 파악하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 이는 영어나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문장을 생성한 단계에서 필요에 따라 사물을 수평 또는 수직 관계로 파악하는 것과 근본에서 차이가 있다.

4. 언어의 차이가 삶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는 외국어를 배움으로써 인간관계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한 예로 수평적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중국인이 대학에서 서구어, 한국어, 일본어를 전공하여 언어를 습득해가는 과정에서 인간관계의 태도가 달라지는 사례를 볼 수 있다. 이들은 단지 외국어를 공부하는 데도 언어의 특성에 따라 학년이 올라갈수록 인간관계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달라짐을 털어놓고있다.

중국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에 유학한 왕효령은 <한국 리포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의 외국어 대학교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돈다. 1학년 때는 똑같지만 2,3학년만 되면 서양 언어 계열을 배우는 여학생과 한국어, 일어를 배우는 여학생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서 한눈에 구별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영어를 배우는 여학생들은 명랑하고 활발하며 당당하다. 하지만 한국어와 일어를 배우는 여학생들은 부드러운 반면 수줍음이 많고 위축되어 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우리반(한국어과)이 제일 조용하고, 여자친구들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지더니, 3학년이 되자, 세 번째 줄에 앉은 여학생의 목소리가 강단에서는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다소 억지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존댓말을 사용함으로써 드디어 한국인의 수직적 구조에 편입하는 데 시간을 좀더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왕효령, <한국리포트>, 가람기획)

5. 언어 구조에 기인한 차별과 억압의 일상화는 어떤 문제점을 낳고 있는가?
첫째, 한국인은 차별과 억압이 일상화한 가운데 지역, 빈부, 직위, 성별, 학벌 등에 따른 차별과 억압을 심하게 느끼면서 억울함에 대한 한을 강하게 형성하고 있다.
한국인은 갖가지 한에 억눌려 살아가는 까닭에 조금만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극단적인 주장과 행동으로 빠져든다. 한국인은 걸핏하면 극언과 욕설을 퍼붓고, 시비와 싸움을 벌이며, 그것도 안 되면 혼자 또는 집단으로 자살을 감행한다.

둘째, 한국인은 차별과 억압이 일상화한 가운데 억울함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차별하고 억압하는 지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차별하고 억압하는 지위에 오르는 일을 출세라고 부르고,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말한다. 한국인이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면서,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져들어 법과 규범이 구실하지 못하는 가운데 무한경쟁의 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 그 결과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에 '만가에 의한 만가의 투쟁'이 더해져서 격렬한 싸움을 낳고 있다.

셋째, 한국인은 차별과 억압에 시달릴 때마다 그것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국가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는다.
무기력한 국가에 대한 반감이 증폭되면서 사람들은 과거의 정권, 정책, 역사에 대한 비하, 기성 정치인에 대한 불신, 기존의 동맹국인 미국에 대한 비난 등을 일삼는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에서 진보와 개혁에 대한 열렬한 동조, 민족과 통일에 대한 낭만적 기대, 북한 체제에 대한 지나친 포용, 중국에 대한 막연한 호감 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면서 정통성, 정책, 역사에 대한 대대적인 뒤집기를 시도한다.


6. 한국인이 민주화를 추진하면서 꿈꾸어 왔던 행복한 사회, 즉 대등과 호혜관계가 근간을 이루는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기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차별과 억압의 일상화를 불러오는 원인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7. 존비어체계를 두고서는 진정한 시민사회를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인이 어떠한 삶을 바라는가에 따라 존비어체계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차등한 인간관계나 신분적 인간관계를 원하는 사람은 존비어체계를 유지하려고 할 것이고, 대등한 인간관계나 민주적 인간관계를 원하는 사람은 존비어체계를 없애려고 할 것이다.

8. 만약 우리가 대등한 인간관계나 민주적 인간관계를 선호하여 존비어 체계를 청산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이때 우리는 사암 정약용이 신분제도에 대해 가졌던 생각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사암은 <발고정임생원론>에서 지배층이 양반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 세상이 어지러워진다고 크게 걱정하는 것에 대해서 "나에게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을 양반이 되도록 하여, 나라 안에서 양반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9. 마찬가지로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높임말을 붙이게 되면 자연히 낮춤말이 없어지게 되어, 말이 평등해지면서 인간관계가 한층 대등하게 될 것이다. 말이 평등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관계가 평등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음식을 먹지 않은 상태에서 배부르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차별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차별이 바로 말투의 불평등에서 비롯하는 차별이다.

 

 

-출처: 최봉영, <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 지식산업사

by 처하 | 2006/09/21 10:48 | Thingking | 트랙백 | 덧글(3) |
예술에 대한 접근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임을 미리 밝혀둠)
다른 일과는 정말 달리 예술에 대한 나의 식성은 참 특이하다.
클래식의 경우, 거의 무지한 수준(뭐 교향곡, 협주곡, 뭐 아주 개념없다)이고
미술의 경우 파도 잘 모르겠고 그냥 남들 아는 수준의 작가에 대해 아주 얕은 지식을
갖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좋아하는 음악가도 없고 화가도 특별히 없으며
전시장이나 음악회를 거의 가질 않는다.

그리하여...
클래식에 대해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이 이론에 대해 줄줄 꽤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그림을 전혀 그리지도 않는 사람이 화가에 대해 배경까지 꽤찬걸 보면
경외롭기도 하다.


하지만...
난 직접 해보지 않으면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지독한 나의 고집은 "예술은 행함으로써 흥미와 이해를 배가한다"이다.
그림도 어쨌든 아마추어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 동아리 때까지 간헐적인 휴지기도
있었으나 그려왔고, 남들만큼 피아노도 쳐봤고, 최근엔 바이올린에 많이 빠져 있다.


즉, 아무런 사전 지식없이 먼저 몸이 땡기는(?)는 대로 직접 체험을 하는 편이다.
바이올린을 배운지 이제 1년이 지나서야 음악에 대한 문자적 갈증이 일기 시작한다.

그저께 교보문고에 책 살 일이 있어 갔다, 미술관련 서적 1권, 음악관련 서적 2권을 샀다.
이제서야 난 초보적인 이론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나는
입으로만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보단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저 몸이 반응하는 대로
몸을 내맡기고 동작으로 행위로 연결되는 그런 사람이 좋다.

 
by 처하 | 2006/09/17 21:08 | Art | 트랙백 | 덧글(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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